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클 패러데이 (문단 편집) == 생애 == [[런던]] 근교에 있는 뉴잉턴 버츠[* 현재는 런던에 편입되었다.]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가난을 피하기 위해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이사한 그는 그때부터 서점의 제본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점원으로 일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이 제본했던 과학과 관련된 서적들을 읽었는데, 이때부터 과학적 흥미가 생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반 강연을 들으면서 화학 실험도 시도해 보았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중에 패러데이의 고용주는 이런 사실을 고객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던 와중 그런 고객들의 아버지 중 왕립 협회의 높으신 분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드디어 19세 때, 당시 최고의 과학자인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 티켓'''을 받게 되어 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이후 아예 과학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를 제본해 데이비에게 보냈으며, 이게 데이비의 눈에 띄었다. 마침 데이비가 실험 중 눈을 다치게 되어 치료기간 동안 자신을 도와줄 조수가 필요했는데[* 참고로 이 실험이 바로 [[플루오린]]을 분리해 정제하는 실험이었다. 플루오린은 다른 [[원자]]로부터 [[전자]]를 [[전자 친화도|빼앗는 정도]]가 너무 강해서 분리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뿐더러, 그 와중에 각종 유해물질들이 쏟아져나오기 때문에, 플루오린 정제 실험을 하다가 골로 간 과학자들도 수두룩했다. 때문에, [[주기율표]]를 고안해낸 불멸의 업적을 세운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를 밀어내고, [[화학]]계의 난제인 [[플루오린]] 분리에 성공한 [[앙리 무아상]]이 [[노벨화학상]]을 거머쥐었을 정도다. 당시 험프리 데이비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게이뤼삭]]과 함께 이 실험을 했는데, 둘 다 무사하긴 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해야했다.], 데이비는 그때 패러데이를 자신의 연구 조수로 발탁했다. 험프리 데이비 본인도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불릴 만큼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실 이 사람도 인간승리의 모범이다. [[콘월]]의 외딴 해변가 마을에서 가난한 목각사의 아들로 태어나, 16살에 아버지의 사망 후 생계를 위해 약제사의 조수가 되면서 독학으로 화학을 배워 과학자가 됐다.] 또한 열이 에너지의 일종임을 증명하고 전기 분해 실험 및 알칼리 금속을 발견하는 등 결코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하필 제자가 본인보다 훨씬 더 월등한 천재인지라 그의 다른 업적들보다 패러데이를 발굴해낸 것이 그의 최고의 업적으로 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당시에도 제자를 높게 치는 사람이 많아선지 패러데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패러데이의 논문에 손을 대 자신이 기여했다는 문구를 추가하기도 했고, [[왕립학회]]의 회원이 될 때 의장이었던 그가 반대했고 패러데이의 가입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반대표는 단 1표가 나왔는데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서는 이를 시기한 데이비가 패러데이를 전문분야가 아닌 유리 연구를 하라고 좌천성 지시를 내렸는데, 패러데이는 여기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당시 실패한 유리 실험물을 말년에 전자기와 빛의 파동 관계를 증명하는 실험에서 아주 요긴하게 써먹었다고 나온다. 앗!시리즈 18권 전기가 찌릿찌릿 편에서 데이비의 모터는 작동하지 않는데 패러데이의 모터가 작동하자 질투를 느낀 데이비는 패러데이가 자신의 모터를 훔쳐갔다고 주장했지만 패러데이는 정직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라 누구도 그의 주장에 관심갖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실험을 보조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이때가 1813년, 불과 22세였다. 이후 1824년에는 '''왕립학회 회원''', 그 다음 해에는 '''왕립 연구소 주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산업 혁명]]의 바람이 불던 영국에서, 밑바닥에서 돈 많은 부르주아의 전유물로 일컬어졌던 과학 분야의 이런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건 당시로선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중년 무렵에는 기억상실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코스모스에서는 병이 심하여 패러데이의 아내가 편지에 추신을 가필해주기까지 했으나 그는 말년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에서 가난한 하층민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자수성가하여 기회를 잡고, 견제와 지병의 고통 속에서도 온화한 인품을 지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간찬가]]의 삶을 살다 간 인류의 귀감이다. 이하에 서술될 다양한 업적을 남긴 뒤, 죽을 무렵엔 [[웨스트민스터 사원|웨스트민스터]] 묘지에 장사를 지낼 것을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기사 작위도 사양했는데 이때 남긴 유명한 말이 "그냥 패러데이로 남고 싶습니다"다. 그래서 그는 죽은 뒤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외에도 살아생전 온갖 혜택 제안이 들어왔지만, 패러데이는 그 구미 당기는 제안들을 대부분 다 거절했다. 패러데이는 "지적인 노력에 대해 상을 준다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패러데이의 이러한 겸손한 면모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고, 지금도 패러데이는 [[아이작 뉴턴]],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찰스 다윈]] 등과 함께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